운현궁
역사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머물렀던 집이자 고종이 태어나고 12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고종이 소년 시절에 살던 집은 1966년에 헐리고, 그곳에 중앙문화센터가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들은 모두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시절에 세워졌다. 조선 말기 절대적인 권력자였던 대원군 이하응의 정치 무대로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하응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1864년(고종1년)에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과 안채인 노락당(老樂堂)이 건립되었고, 1869년에 안채이자 별당인 이로당(二老堂)이 건립되었다. 이후 운현궁의 규모가 커지고, 대원군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궁에서 경비병이 파견되었고 관리인도 늘어나면서 그들의 거처인 수직사(守直舍)가 건립되었다. 운현궁의 규모는 점점 확대되었으며, 고종이 머물던 창덕궁과 운현궁을 연결하는 대원군의 전용문이 설치되었을 만큼 그 규모와 위세가 대단하였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의 무대이다.
그러나, 명성황후 민씨는 친정(親政)을 바라는 고종을 움직여 대원군 축출 공작을 추진하였고, 마침내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빌미로 대원군을 정계에서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1873년 11월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문이 왕명으로 폐쇄되었고, 결국 하야(下野)할 수밖에 없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벌어지면서 난을 일으킨 군사들이 운현궁으로 몰려와 대원군에게 정국 개입을 요청하자, 입궐하여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여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청나라 텐진으로 납치되었으며, 3년이 지난 1885년 2월에야 환국하게 된 뒤 유배자와 다를 바 없는 은둔 생활을 하였다. 대원군은 이후로도 재집권의 집념을 버리지 않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1898년에 별세하였다.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였는데, 운현궁 역시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다.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 운현궁의 소유권을 두고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벌어졌는데, 결국 같은 해 9월에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이후 1991년 이청씨가 운현궁을 개인적으로 유지, 관리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양도 의사를 밝혔고, 서울시가 운현궁을 매입하여 지금까지 관리•운영하고 있다.
1993년 12월부터 1996년 10월까지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진행되었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