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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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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인사동

소개

한국전통문화의 거리, 인사동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인사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관인방(寬仁坊)의 인(仁)과 대사동(大寺洞)의 사(寺)를 취해 지금의 명칭이 되었다. 조선 초기 도화서 터가 이곳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미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인사동 골목길이 보이는 사진
이후 1930년대에 골동품,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화방, 고가구점, 민속공예품 점포들이 생겨나면서 전통문화 거리로서의 명성이 더욱 확고해졌다. 지금은 전통 가게들과 찻집, 현대식 건물이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으며 곳곳에 역사적 흔적들이 남아 있어 인사동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

인사동 주택 지붕이 있는 흑백사진
인사동
역사
인사동은 한국인의 삶과 역사, 문화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조선왕조(1392~1910)때부터 근 600년 동안 서울의 심장부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 예술관청이었던 도화서가 위치해있어 일찍이 예술로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기반되어 당대 유명화가들이 이곳에서 예술작업을 펼칠 수 있었다.

현재 ‘인사동’이라 불리는 지역은 조선시대 경화세족(京華世族)들이 모여 살던 북촌(北村)의 초입으로, 당시에는 사대문 안(현재의 종로구와 중구 일대)만이 서울이었는데, 그러한 서울 안에서도 인사동은 지리적 중심이라 할 수 있었다. 북쪽에는 궁궐과 관청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시전(市廛)을 두고 있어서 관료들이 살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실제로 이곳은 북촌과 더불어 지체 높은 관료들의 대표적인 거주지였다.

개항 이후 1900년 즈음부터 외국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주거지역이었던 인사동에도 상업 시설, 유흥 시설들이 들어섰고, 2층 양옥집도 지어졌다.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양반들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결국 북촌 및 인사동에 살던 양반들이 집을 팔고 이사를 나가면서 값진 기물들을 처분하였는데, 인사동은 북촌에서 종로로 나가는 길목이었기에 자연히 이곳에 오래된 고서화 및 골동품 등을 거래하는 상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 명동•충무로 지역에 흩어져 있던 골동품상들이 땅값과 임대료 상승으로 옮겨오면서 인사동은 본격적으로 골동품 거리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인사동은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3월 1일 직전에 독립선언서 1,500매를 학생들에게 배포한 곳이 현재에도 인사동에 건재해 있는 승동교회이며, 3월 1일 당시에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은 태화관(현재 태화빌딩 자리)이라는 요릿집이었다. 인사동 바로 옆의 탑골 공원에서도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3•1운동이 본격 발화하였다.

1960~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인사동은 한옥, 고서화, 골동품 상점 등으로 가득한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그리고, 1970년 현대화랑이 개관한 이후 여러 화랑들이 이곳에 밀접하면서 화상(畵商)의 거리라는 명성도 얻게 되었다. 이후 강남 개발이 본격화면서 인사동 화랑의 위세가 약해졌지만, 지금도 많은 화랑과 화상이 남아 있다.

서울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인사동에는 대한 제국기 때부터 수많은 정치•사회단체의 사무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1955년에 민주당사가 들어선 이래, 1996년 신한국당이 여의도로 이전할 때까지 인사동은 ‘정치 1번지’로도 불렸으나, 대부분의 정치•사회단체들은 60년대 중반 이후 속속 인사동을 떠났다. 일제강점기부터 인사동에 몰려 있던 병원들도 1970년대 강남 개발 이후 대부분 자리를 옮겼다.

2000년에 인사동길(인사동 중심도로)은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새단장되었다. 전돌로 바닥을 포장하고, 군데군데 네모난 바윗돌을 두어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였다. 북인사마당과 남인사마당이 새롭게 정비되었고, 2002년 4월에는 서울시에서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하였다.

현황

인사동 상점 입구 사진
현황
살아있는 박물관

인사동은 현재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지이자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다. 남쪽으로는 종로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북촌(北村)으로 이어지며, 서쪽으로는 조계사와 광화문광장, 동쪽으로는 운현궁 및 돈화문로와 맞닿아 있는 데다가, 경복궁•창덕궁과도 가까이 위치해 있어 가히 서울의 중심적인 문화 거리라 할 만하다.

인사동을 남쪽(종로2가 쪽)에서부터 접근한다면, 가장 먼저 남인사마당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고, 그냥 앉아서 쉴 수도 있으며, 때마다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제 큰길(인사동길)을 따라 올라가면 양쪽으로 수많은 가게들과 노점상이 늘어서 있는데, 노점상에선 주로 간식거리들과 자그마한 공예품들을 팔고, 입점해 있는 가게들 가운데는 고미술상, 표구상, 필방, 골동품점 등이 드문드문 위치해 있어 인사동에 왔음을 실감나게 해준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인사동 네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으로는 악기판매점으로 유명한 낙원상가와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조계사 방면으로 빠지는 길이다. 큰길 따라 그대로 직진하면 인사동의 중심부로 진입하게 되는데, 역시 길 양쪽으로 전통문화와 관련된 가게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특히, 1924년부터 문을 연 지상 5층 규모의 통인가게는 그야말로 인사동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겠는데, 각 층마다 생활자기, 공예품, 장신구, 고가구 등을 진열해놓고 있다.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방문할 수도 있겠으나, 그냥 둘러보기만 해도 좋은 구경이 될 것이다.

통인가게에서 약간 올라오면 2014년에 새롭게 들어선 복합문화공간 ‘인사동 마루’가 있다. 지상 6층 규모에 공예품, 패션상품 등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입점해 있고, 식당과 카페, 전시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특히, 4층부터 6층까지 자리한 ‘뮤지엄 김치간(間)’에서는 한국의 대표음식 김치에 관한 다채로운 전시가 진행되고 있으며, 김치를 담그거나 직접 맛보는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수도약국을 지나 ‘쌈지길’과 마주하게 되는데, 쌈지길은 2004년에 처음 문을 열자마자 많은 인기를 모은 곳이다. 이곳은 1층부터 4층까지 난간 형식의 길이 이어지고, 길 옆으로 여러 가게들이 입점해 있는 형태를 갖고 있는데, 이로 인해 방문객들은 계속 인사동 길을 걸으며 가게 구경을 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인사동길의 북쪽 끝에는 북인사마당이 있다. 안국역에서 내린다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곳으로 대형 붓 모양의 조형물이 인사동에 왔음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북촌으로 연결되며, 양 옆으로는 경북궁과 창덕궁으로 이어진다. 북인사마당과 남인사마당에 각각 한 개소씩 관광안내소가 있다.

그리고, 인사동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큰길 양쪽으로 실개천처럼 뻗어있는 골목길이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저마다의 전통과 개성을 자랑하는 식당과 찻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음식냄새와 차향기가 뒤섞이고, 지나는 사람들과 어깨를 스치면서 조금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아스라한 정취를 느끼게 된다. 인사동이 갈수록 상업화 되어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데, 이런 골목길들이야말로 아직 인사동만의 멋을 간직한 고향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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