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바로가기
팝업 닫기
팝업 닫기
이용불편 신고하기
-
-
*연락 가능한 번호(필수)
*문제점 및 현황 자유롭게 기재
*문의 내용은 담당자의 확인 후 개선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용불편 신고가 완료되었습니다.

한옥자료

한옥자료
한옥자료 공지사항

공지사항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奇運探訪) - 안영배

조회수 : 604
등록일 : 2024-04-27
페이스북 공유 보내기 - 새창열림 네이버블로그 공유 보내기 - 팝업열림 카카오톡 공유 보내기 - 새창열림 트위터 공유 보내기 - 새창열림 URL 복사 이미지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SEOUL MY SOUL
2024 북촌마을여행 | 기운탐방(奇運探訪)
서울한옥

기운탐방(奇運探訪)

북촌문화센터
조선 최고의 권력과 부가
집중됐던 명당 북촌,
물길에 맺힌 기운을 따라
역동적인 시대사를 담은
터를 탐방해보는 시간

前 동아일보 부국장
미국 Caroline 대학교
철학과 교수

안영배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2024 북촌마을여행 | 기운탐방(奇運探訪)

왕기(王氣) 깃든 북촌,
조선 권력층의
보금자리

조선 세종대왕 때인 1433년 7월 지관 최양선이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는 발언을 했다. “보현봉의 바른 줄기인 정맥(正脈)이 직접 승문원 터로 들어왔으니 바로 현무(玄武)가 머리를 숙인 땅으로서 나라의 명당으로 이만한 데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백악봉)은 보현봉의 정맥이 아니라 가지인 지맥(支脈)에 불과하다는 최양선의 발언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통성까지 ‘위협하는’ 것이었다. 최양선은 이어 보현봉의 바른 줄기가 이어진 “승문원 자리로 창덕궁을 옮기면 만대의 이익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그 승문원 자리가 지금의 현대빌딩(종로구 원서동) 일대, 즉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북촌이다.

북촌 일대 위성사진(구글). 조선 세종때 지관 최양선은 북한산 보현봉의 바른 줄기는 경북궁 뒤쪽의 북악산이 아니라 창덕궁 쪽 매봉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당시 세종은 국가 공인 지관인 최양선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조정 대신들에게 이 일을 논의하도록 했다. 그러나 성리학을 숭상하던 유신(儒臣) 대다수는 최양선을 ‘망령된 자’로 몰아붙였고, 임금에게 풍수설 같은 헛된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충고까지 했다. 세종은 대안으로 100여 간 규모의 별궁 건설을 제시했으나 대신들은 이마저 반대했다. 결국 세종은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까지 아예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이 터를 그 누구도 쓰지 못하도록 결론지었다.

세종 때 한바탕 풍수 논쟁이 벌어졌던 북촌은 잠시 ‘잊힌 땅’이 되긴 했지만, 40여 년이 흐른 후인 성종 때에 또다시 입방아에 올랐다. 1477년 “임원준이 궁궐을 지을 땅에 자손의 집을 짓고 있으니 이는 반역과 같은 죄”라는 상소문이 성종에게 전달됐다. 당시 조정을 장악한 훈구파의 핵심세력이었던 임원준의 손자가 선왕(先王)인 예종의 고명딸 현숙공주와 혼례를 치른 후 ‘나라의 명당’인 승문원 터에 신혼집을 차린 것을 두고 왕기(王氣)를 노린 행위라는 투서였다. 사실이라면 멸문을 불러올 사안이었다. 임원준은 급했다. 성종에게 그곳이 왕기 터가 아님을 납득시켜야 했다. 임원준은 “이 땅이 일찍이 벼락을 맞은 바 있고, 또 시속(時俗)에 독녀혈(獨女穴)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자가 일찍 과부 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라고 변명했다. 나라의 대명당인 승문원 터가 졸지에 과부를 배출하는 ‘독녀혈’ 터로 둔갑했다.

한양에서 이 일대가 ‘과부굴(독녀혈)’로 불린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는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황보인 등 반대파를 재동에서 무참히 살육했다. 계유정란이라는 세조의 쿠데타로 처형당한 이들이 흘린 피 냄새가 너무 심해 땅에다 재를 뿌려야 할 정도였다. 그 아내들은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어버린 과부 신세가 됐다. 오늘날의 북촌 재동이 당시에 ‘잿골’ 또는 ‘회동(灰洞)’으로 불린 배경이자 이 일대가 과부들의 소굴인 과부굴이 된 사연이다.

독녀혈이라는 세언(世諺)까지 끌어대면서 승문원 자리인 북촌 일대가 명당이 아니라고 강변한 임원준은 풍수지리설에 매우 밝았던 인물이다. 실제로 승문원 자리가 흉지였다면 피붙이 손자가 신혼집을 차리도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터다. 아무튼 성종은 자신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외척을 보호하기 위해 임원준의 말을 ‘믿어주는’ 쪽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이후에도 북촌은 왕가의 집터로 활용됐다. 안국동 서울공예박물관 터(옛 풍문여고)는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이 살던 동별궁(東別宮)이 있던 자리다. 세종이 지관을 동원해 명당 터로 지목했던 이곳은 세종이 승하한 곳이자 문종이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이 터는 대대로 왕족이 살았다. 성종 때는 월산대군의 집으로, 중종과 인조때는 혜순옹주와 정명공주의 집으로 사용됐다. 그러다 고종때는 순종의 가례를 위해 별궁을 지으면서 안동별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안국동의 서울공예박물관. 안내판에는 이곳이 과거 안동별궁이었다고 씌어 있다.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뿐만 아니다. 지금의 헌법재판소(재동 83번지) 자리는 영조의 딸인 화길옹주(1764~1772)가 살았던 능성위궁이 있던 곳이다. 또 헌법재판소를 기준으로 서쪽의 덕성여고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1667~1701)와 같은 여흥 민씨인 명성황후(민비)가 머물던 감고당이 있던 곳이고, 그 동쪽의 현대빌딩 사옥터는 흥선대원군의 조카이자 고종의 사촌인 완림군이 살던 계동궁이 있던 곳이다.

이처럼 북촌 일대는 풍수적으로 권력 기운이 왕성한 천기혈(天氣穴)이 곳곳에 맺혀 있다. 흥미롭게도 북촌의 왕기는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 시대에 결실을 맺은 듯하다. 1945년 광복 이후 이곳의 왕기 기운을 누린 정치인으로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1870년에 지어진 윤보선 가옥(안국동 8-1)은 헌법재판소와 바로 이웃한 곳으로 윤보선의 대통령 당선에 영향을 준 명당이고, 17대 대선 1년 전인 2006년 가회동으로 이사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양택 역시 명당 기운이 강하다는 게 풍수계의 해석이다.

안국동의 윤보선가(사적 제438호). 1870년 경에 지어진 이 가옥은 민가로서는 최대 규모인 99칸 저택으로 유명하다.

조선 개국의 역사와 함께 하는 북촌은 지금도 왕성한 터의 기운이 작동하고 있다. 그 중에는 권력의 기운뿐만 아니라 부의 기운, 학문의 기운, 심지어 사람에게 유해한 기운 등도 섞여 있다. 북촌의 길흉(吉凶) 터를 답사하는 풍수 여행은 사람과 터가 교감하는 삶의 현장을 되짚어보는 길이기도 하다.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하늘 기운이 담긴
기천석과 성제정

북촌 풍수 답사는 기천석에서 시작한다. 삼청동 끝자락 칠보사를 지나 조금더 고갯길을 올라가면 기천석(祈天石)이라고 씌어진 커다란 바위 두 개를 만나게 된다. 가로가 약 130cm, 세로가 약 80cm로 잘 다듬어진 암석이다. 지금은 가수 전인권씨 자택의 담장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바위는 이름 그대로 ‘하늘에 기원하는 돌제단’이다. 바로 옆으로는 제단에 쓰였던 장대석도 보이는데, 전씨 집의 입구 계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늘에 기원하는 돌 제단인 기천석(祈天石). 바위에 ‘祈天石 康日菴 徐月堂 咸豊三年癸丑仲春書(기천석 강일암 서월당 함풍삼년계축중춘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바위에는 ‘祈天石 康日菴 徐月堂 咸豊三年癸丑仲春書(기천석 강일암 서월당 함풍삼년계축중춘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철종 3년인 1852년 2월(함풍 삼년 계축 중춘)에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김좌근, 김재근 등 장동 김씨들이 권력을 대대로 이어가며 누리기를 하늘에 빌면서 새겼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한편으로는 기천석은 선교(仙敎), 강일암은 불교, 서월당은 유교를 상징하는 구절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

분명한 것은 기천석이 풍수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기운)를 머금고 있는 혈석(穴石)이라는 점이다. 오행으로는 금(金)의 기운이 강해 권력과 명예 운에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천석 뒤편에는 태어난 해를 표시하는 ‘신유생(辛酉生)’으로 적혀 있는 각자도 있다. 토속 신앙에 심취한 옛 사람들은 영험한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음으로써 바위의 기운을 자신이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지금이야 자연 훼손으로 비난받을 행위인데,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기천석에서 30m 정도 내려오면 성제정(星祭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성제정은 별에 제사 지내는 우물이라는뜻이다. 이곳은 조선 후기 정조의 수라상에 진상된 물이라고 소개돼 있는데, 조선 전기 때는 국가 제사를 관장하는 소격서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던 성수(聖水)로 전해진다. 소격서는 하늘과 별, 산천 등에 소원을 비는 등 도교적 성격이 짙은 기관인데, 고려 때 개경의 궁성 북쪽에 있다가 조선의 한양 천도와 더불어 이곳(현재 삼청파출소 부근)으로 이사왔다.

흥미롭게도 성제정의 기운은 기천석의 기운과도 이어진다. 두 곳이 마치 형제처럼 짝을 이룬 명당이라는 뜻이다. 흔히 명당 터에서 나오는 물은 건강에 좋다는 육각수 구조라고 알려져 있다. 정조가 이 물을 마시고 피부병이 나았다는 설화도 이런 배경을 깔고 있는 듯하다. 옛 사람들은 기천석에서 하늘에 소원을 빌고, 그 아래 성제정에서 물을 마시는 것으로 자연의 좋은 기운을 받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보면 국운이나 개인의 소원을 비는 명소로 이름난 이 일대가 삼청동(三淸洞)으로 불리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삼청’은 도교에서 하늘의 세계를 표현하는 의미로 별을 붙인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을 가리키는 용어이니, 삼청동은 도교의 신선사상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기천석 아래편에 있는 성제정.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학문 기운 넘치는
맹사성 집터와
정독도서관

북촌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자랑하는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앞에는 맹사성(1360~1438) 집터가 있다. 효성이 지극해 효자 정문(旌門)을 받은 조선 초의 명재상인 맹사성이 살던 곳이다. 지금의 정독도서관 뒤편인 북촌 고갯마루에 있는 이곳은 명사성이 살던 곳이라고 해서 ‘맹현(孟峴)’으로 불리기도 한다. 집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현재는 ‘고불 맹사성 집터’라는 안내판만 걸려 있다.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앞에 표시된 고불 맹사성 집터.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이 집터를 보면 고불 맹사성이 왜 청백리로 유명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집은 경북궁 강녕전에서도 보일 정도로 북촌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세종 임금은 스승이었던 맹사성 집에 불이 켜져 있으면 스승보다 먼저 잘 수 없다고 하면서 불이 꺼진 이후에야 잠자리에 들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대체로 고갯마루에 자리한 곳은 풍요 혹은 재물 기운보다는 권위 혹은 명예의 기운이 강하다고 본다. 맹사성은 퇴청하면 이곳에서 피리를 불며 자연을 즐겼다고 하는데, 집터 자체가 청렴결백한 선비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또한 오행상 목(木)의 기운이 강해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곳이기도하다.

맹사성 집터에서 지맥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정독도서관이 있다. 이곳 역시 학문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터의 내력이 이를 증명해준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 10월 우리나라 최초로 관립중학교가 건립돼 나라의 인재들을 길러내기 시작했고, 이후 관립한성고등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기중·고등학교로 개칭하면서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1976년 경기고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서울시가 이곳을 매입해 시립도서관인 정독도서관을 개관했다.

학문 기운이 왕성한 정독도서관.

정독도서관이 명당 터라는 점은 주변의 지형에서도 확인된다. 정독 도서관에서 남쪽을 바라보았을 때 남산의 봉우리가 가장 수려하면서도 안정된 모습으로 다가온다. 종을 반듯하게 엎어놓은 형상인 남산은 더 멀리 남쪽의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잘 갈무리하면서 터를 편안하게 해주는 게 인상적이다. 명당 터답게 정독독서관은 이곳에서 공부하거나 소원을 빌면 고시 등 시험에 합격하거나 학문적 성취를 이룬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다.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기이한 기운,
유령의 집과 도깨비 집

북촌이라고 해서 모두 명당 터는 아니다. 북촌에도 기이한 터 기운에 의해 좋지 않은 일을 겪은 사례들은 적지 않다. 북촌 화동(북촌로5나길)에는 북촌 원주민들 사이에서 은밀히 소문난 ‘유령의 집’으로 불리는 집터가 있다.

사연은 이렇다. 현재 벽돌로 지어진 2층 규모 건물이 들어선 이곳은 과거에 개량한옥이 있었고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부부는 동네 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이 집에서 아내가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끈질긴 수사 결과 아내를 죽인 범인이 완벽한 알리바이를 꾸민 남편임이 드러남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사건 이후 당시 동네 통장인 한 할머니가 흉흉하다고 소문난 집을 싼값에 사들인 후 장남에게 물려주었다. 그런데 철도 전기관리 일에 종사하던 장남은 이 집에 들어와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에 감전돼 생을 마감했다. 두 차례에 걸쳐 사람들이 사망하자 마을 사람들은 집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면서 ‘유령의 집’이라고 쉬쉬했다고 한다.

‘유령의 집’ 뿐만 아니다. 사간동의 한 갤러리는 1960년대 말 가정집이었는데 도깨비가 출현하고 도깨비불이 떠돌았다고 해서 ‘도깨비 집’이라고 불렸다. 실제로 이 집에서 도깨비불을 봤다는 마을 사람들이 많았고, 이 집을 사서 이사 왔다가 새파랗게 질려 다시 이사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결국 집주인이 3번 바뀌고 나서야 도깨비 소문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북 출신인 마지막 집 주인은 이 터와 궁합이 잘 맞아 많은 재물을 모았고 자식들도 모두 잘 풀렸다고 한다. 도깨비 집터는 극단적으로 길과 흉이 교차한다는 속언과 맞아떨어진다고 할까.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또 명당과 흉지(凶地)가 바로 이웃해 극명하게 비교되는 곳도 있다. 안국동의 윤보선가와 헌법재판소 내 홍영식의 집터가 이런 경우다. 윤보선가는 대통령을 배출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명당인 반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했던 홍영식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했고 그 집마저 몰수당했다.

헌법재판소 내 제중원 터. 과거 갑신정변의 주역인 홍영식 일가가 살던 터로 이곳에서 참변이 발생했다.

홍영식이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나라를 개화하고자 일으킨 갑신정변의 대가는 컸다. 그의 아버지 홍순목은 “늙은 신하가 역적을 키웠으니 나라에 큰 죄를 지었다”고 한탄하면서 손자와 함께 독약을 먹고 자결했으며, 그 아내는 강에 몸을 던지는 참화를 겪었다. 한마디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고종은 후에 홍영식의 집을 미국 선교사 알렌에게 주었고, 알렌은 근대식 왕립병원인 제중원을 이곳에 세웠다. 지금은 헌법재판소 부지인 이곳은 홍영식 집터라는 간판이 새겨져 있는데, 터의 기운은 생기(生氣)와는 거리가 멀다.

윤보선가와 제중원 터(홍영식 집) 사이에는 천연기념물인 백송이 있다. 흰 빛의 줄기가 신비감을 자아내는 이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 헌법재판소를 비롯해 주변을 굽어보는 위치에 서 있다. 우리 근대사에서 격동의 현장을 지켜본 이 백송은 명당 터에 자리잡고 있다. 나무도 명당 터에 잡아야 잘 자랄 수 있고 사람들의 주목주목을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들 치고 명당 터 아닌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북촌,
한양의 중심 좌표 되다

조선시대 승문원이 있었던 현대빌딩 사옥에는 천문관측 기구인 관천대와 함께 관상감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관상감은 조선시대 천문, 지리, 역수(曆數), 측후(測候) 등을 담당했던 관서다. 측우기, 물시계, 해시계가 모두 이곳에서 발명됐다.

관상감이 이곳에 들어선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곳이 한양의 천문지리를 연구하는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관상감 터와 탑골공원, 그리고 남산 정상이 동일한 남북 자오선(子午線) 상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관상감에서 종로3가의 원각사 십층석탑이 있는 탑골공원과 남산의 남산타워까지가 모두 일직선으로 같은 경도선(126.9883)에 있다. 이는 관상감 터에서 바라보았을 때 남산의 높은 봉우리에 해가 걸리는 시각이 정확히 정오(正午)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계가 없던 시절, 이곳은 시간의 기준점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관상감 터에서 더 북쪽으로 남북 자오선을 이어보면 중앙중·고교를 지나 한양도성 북벽 근처의 휴암(부엉이바위)으로 이어지고, 더 북쪽으로 멀리 그어보면 삼각산(북한산)과도 연결된다. 한양의 진산이 삼각산이 되는 또다른 배경이 된다.

천문지리상으로도 중요했던 이 터는 이후 경우궁(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 사당), 계동궁(흥선대원군의 조카 완림군의 집), 휘문고교 등으로 활용되다가 1983년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에 의해 현대그룹 계동 사옥으로 변신했다.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氣運探訪  안영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재동 백송. 헌법재판소, 윤보선가옥 등 북촌 주변을 굽어보는 위치에 서 있다.

조선시대 관상감 터였던 현대빌딩 사옥. 관천대가 이곳이 관상감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재벌 그룹중 하나인 현대그룹을 상징하는 이곳에 터를 마련한 정주영 회장은 한때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1992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한 통일국민당 창당, 1998년 ‘소떼 방북’ 등 대북사업 등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대통령이 되려던 정치적 꿈을 접어야 했다. 비단 정주영 회장 뿐만 아니다. 그 이전인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 개화파들은 당시 이 터(경우궁, 계동궁)에 고종을 머무르게 하면서 혁신내각을 꾸미는 등 개혁을 꿈꾸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이 터는 권력(權力)보다는 금력(金力)에 가까운 기운이라는 게 그간의 역사가 증명해준다. 세종 때 지관 최양선이 “승문원 자리로 창덕궁(권력)을 옮기면 만대의 이익(금력)이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주장은 후에 권력이 아닌 민간기업에 의해 국부를 창출했으므로 절반만 맞힌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수는 땅과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읽는 작업이다. 북촌은 다양한 땅의 기운이 표출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진진한 풍수 현장이다.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奇運探訪) - 안영배

 

[북촌마을여행 웹진] 기운탐방(奇運探訪) - 안영배 이미지
cc-by-nc-nd
페이스북 공유 보내기 - 새창열림 네이버블로그 공유 보내기 - 팝업열림 카카오톡 공유 보내기 - 새창열림 트위터 공유 보내기 - 새창열림 URL 복사 이미지 프린트 아이콘